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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4. 21. 19:19

Audiobook ~ 03:40:53, Translated on 19 April, 2019

 

  간혹 어떤 사람들은 우울에서 명곡이 탄생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예술에는 불안이 필요하다. 내겐 그렇지 않다. 삶을 느끼고 살아있음을 느낄 때 비로소 내게서 좋은 곡들이 나온다. 삶의 신성함을 드러내는 거야 말로 비로소 곡을 쓰는 첫 단계가 된다. 우울 속에 빠지면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다. 그리고 DPT 이후 모든 게 멈춰버렸다. 내겐 잃어버린 계절이 있었다. 낭비와 과잉의 시간이었다. 아무 것도 아니었던 시간. 좋은 마음으로 DPT를 떠났다고 느꼈지만,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난 슬픔을 느꼈고 난 약간의 교훈을 얻게 되었다. 게을러지지 말자. 마음이 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자. 미구엘을 스튜디오에 들이지 말자. 'Bang Bang You're Dead'와 비슷한 노래를 12개나 쓰려고 하지 말자. 스스로 강하게 되뇌었다. 여름이 빠르게 떠나갔고 크리스마스가 찾아왔다. 그리고 난 내가 뭔가를 새로 창조한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것도 한 게 없었고, 완전히 진공 상태였다. 다시 돌아보면 난 내게 따라붙던 모든 조롱을 떨쳐내고 도래할 현실을 기다렸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당시엔 그렇게 느껴지진 않았다. 상담을 받아야 하는 시점이 찾아왔다. 내게 활기를 되찾게 해준 일들 중 하나였다.

 

  DPT 해체 이전에도 상담 치료를 받고 있었지만 난 치료가 될 거라 믿음을 갖지 않았다. 모든 게 늙은 사람들의 낡은 가르침으로 보였다. 그들의 약점과 패배를 이야기하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처음 상담을 받아보자고 시도했던 건 처음 나 스스로가 가라앉고 있는 거 같다고 생각했던, 피터가 막 감옥으로 들어갔던 그때였다. 난 여전히 할리 거리에 살고 있었다. 아마 정문은 고쳐뒀던 것 같다. 잠에 들고자 술을 마셨고 아주 가끔 깨어있는 상태 그대로 침대에서 기어 나왔다. 그 어떤 고난이 있어도 나를 지켜봐 줬고 마음을 열어주었던 친구와 함께 그가 추천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이동했다. 기괴한 볼거리가 되어갈 거라 여겼지만 난 너무나 절망적이었고 불행했다. 내 일부는 그러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담사는 내 최악의 예상을 뛰어넘어 내게 술이나 약을 그만두고 중독 치료의 12단계를 제안해왔다. 난 내가 어떻게 반응했었는지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 내 문제는 그게 아니고, 우울증이에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에요? 그 뒤에 가서야 나는 그 두 가지의 사용을 그만두는 게 회복하는 방법이었고, 정답이었고, 여러 조언 중 하나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 진실을 깨닫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토록 술과 약을 하지 않았다면 우울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질 수가 없었다. 이미 난 그게 나라는 존재의 일부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가까이하지 않았었더라면 살기는 더 쉬웠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든 그 12단계라는 건 내가 고르고 싶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난 두 번 정도 그를 봤을 뿐이었다. 난 내가 듣고자 하는 답을 얻지 못했다. (이게 얼마나 어리석게 들릴지 나도 충분히 알고 있다.) 내겐 지나치게 엄격하고 빡빡했다. 그 모든 가죽 의자와 황동으로 만든 개의 조각상, 그리고 기록되고 있는 '당신의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에 대한 대답. 난 이게 무슨 도움이 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난 너무 바쁘니까 술을 마시지 말자고 결정했다.

 

  뭐든지 상황이 바뀌면 다르게 보이기 마련이다. 다른 날, 다른 마음가짐으로 혹은 천 가지가 넘는 변수 중 하나라도 다르게 된다면? 난 여전히 자문자답할 때가 있다.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하고 나서 난 그냥 미쳐버렸다. 두 밴드를 거쳐오며 나는 얼마나 술을 마시고 얼마나 약을 했었는지. 이 책의 6장만 봐도 내가 얼마나 자기파괴적인 행위를 해왔는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난 우리가 몸을 던진 상황을 지켜보았고 우리가 신중해질 수 있었던 순간이 있었는지 돌아보았다. 내면에 잠재된 내 무의식이 그런 버튼을 누르려고 했을까? 다음 치료는 DPT에 있었을 때 두 앨범 사이에 시행되었다. 우리 밴드는 그때 어딘가 어중간한 상태에 놓여 정체되어 있었고 연료가 떨어져 멈춘 자동차 신세였다. 킥복싱을 배우기로 한 건 그 이후쯤이었다. 우리 매니지먼트의 누군가가 다들 킥복싱을 배우는 게 어떠냐며 밀어줬다. 결코 킥복싱이 치료 방법의 일환은 아니었지만. 다들 안 하기로 하는 와중에 나만이 킥복싱을 하게 되었다. 그런 무예를 통해 내 안에 갇힌 감정들을 발산할 수 있는 연습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난 사나워지며 그저 모든 게 내 안에 쌓여갈 뿐이었고 가슴이 술렁였고 갈비뼈 밖으로 숨은 튀어나오지 못했다. 모든 걸 쏟아내지 못했다. 댐에 물이 흘러나오게 하는 아주 작은 틈 조차 만들어내지 못했다. 나중에 난 기진맥진해 절망하며 무척 화가 나버렸다. 내겐 어떤 위안도 되지 않았다. 한 주에 3번씩 갈 때마다 꼬박꼬박 매번 숙취를 끌어안은 상태로 킥복싱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 끝엔 결국 질렸다. 완성하고 싶었지만 숙취로 인한 어지럼증으로 기술을 제대로 걸지도 못했다. 난 전부 끝을 맺기로 했다. 포기한 것이다. 상대의 얼굴을 충분히 때리고 있었지만, 그 안에 내 마음은 담겨있지 않았다. 그 후, 난 슬럼프에 빠졌다. 산책이라도 나가면 내 기분이 나아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일어나서 집 밖을 나갈 힘이 없었다. 밴드의 누군가가 나에게 대화를 시도한 적도 있었다. 몇 개 노래를 들려주며 내 흥미를 끌고 다시 함께 작업을 해보려고 시도했다. 그럼에도 난 쓸모가 없었다. 모든 것의 꼭대기엔 갈기갈기 찢어진 매니지먼트의 문제가 있었다. 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찾았다. 난 그게 밴드의 종말이 오기 전의 전주곡으로 들렸다. 내겐 책임져야 할 검은 개가 있었고 내 여자친구와 다투게 되었다. 난 내 마음이 안정되는 걸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난 깨진 유리병들이 나뒹구는 곳에서 재미를 찾았다. 내 자존감은 뭉개졌고 다른 상담사에게 연락했다. 날 보겠다고 동의하게 하려고 내 문제를 별거 아닌 듯이 꾸며냈다. 얼마나 내가 엉망이었는지 보여주는 증상이었다.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다른 사람들과 가까이 하지 않으려 했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 즈음, 내 두 번째 상담가였던 그를 사려 깊고 좋은 친구라고 여겼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그가 내 인생에 그리고 실제로 다른 사람의 인생에 간섭하고 있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를 그만 보기로 한 진짜 이유는 그가 내 인식을 바꾸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히피 공동체와 워킹클래스 집 사이에서 받은 교육이었던, 마치 이성을 잃은 탁구공과 같은 상황으로 들어가보자며 심오한 아이디어를 제시했고 나는 그러자고 동의했다. 난 뭘 기대했던 걸까. 아마 코츠월드나 웰시 국경 즈음의 오두막일지도 모른다. 전망이 잘 보이는 널찍한 유리창과 펼쳐진 언덕이 있고, 우리 모두는 커다랗고 낡은 안락의자에 앉는다. 내 속을 다 읽는 듯이 날 보는 고양이도 한 마리 있겠지. 난 히드로 공항의 출국 라운지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 놀랐다. 난 아직 뭔가 마시기엔 좀 이른 시간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리고 술을 찾아 그에게는 권해도 난색을 표하지 않을까 싶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내게는 여행 중 단 한 방울도 허용되어 않았었다고 한다.) 한 두 시간쯤 흘렀을까 우리는 스페인 서부에 도착했고 히피 공동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곳에 도착했다. 공동체의 실체는 내게 엄청난 충격을 줬다. 저글링과 불을 뿜는 모습, 외바퀴 자전거를 탄다. 말을 타고 묘기를 부리고 추잡한 모습의 나체 상태로 수정을 어루만지며 부활의 의식을 거행한다. 모든 종류의 흑마술이 시도되고 있었다. 난 요가 활동에 조금 참여했는데, 제법 흥미로웠고 생각보다 어려웠다. (비록 나는 내 운동 요법을 이미 걷어찬 적이 있었지만.) 수정을 어루만지는 게 주가 되는 대부분의 의식을 피해 다니며 공동체의 텃밭에서 자란 재료로 만든 비건 식사를 무신경하게 우적우적 씹었다. 내 상담사와 함께하는 활동은 즐거웠지만 그 외에는 내 어린 시절로 들어가는 것 같다는 느낌을 벗어날 수 없었고 Westworld의 한 장면 같다고 느꼈다. 과거의 현실에 몰두하는 율 브린너의 모습을 한 도박꾼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약간의 기분 전환에 불과한 작은 즐거움일 뿐이었다. 움찔거림으로 인해 내 얼굴이 아파왔다. 난 육체적으로도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나 자신의 문제에 스스로 직면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잠시 여정을 떠났었을 때,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게 다시 길을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 난 할아버지를 데이빗 니븐같다고 우상처럼 생각하기도 했었다. 씻지도 못하고 새로 태어나지도 못한 채 그저 더 잃기만 하고 공동체를 떠났다.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작별인사도 전하지 못했고 임종을 곁에서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느꼈다. 그의 장례식 때 마저 난 완전히 걸레짝이었다. 최악의 상황에 온 가족이 다 모이려 하는 와중에도 나는 할머니를 도우려 노력했다.  그녀는 65년 동안 함께 해온 인생의 동반자를 막 잃었다. 스페인의 여행 따위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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