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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9. 12. 01:34

Audiobook ~ 02:31:20, Translated on 11 September, 2018


  어쨌거나 다시 첫 번째 앨범 이야기로 돌아가자. 난 여전히 그 앨범이 자랑스럽다. 내 인생에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어느 앨범이라도 그 결과가 성공이던 실패던간에 내 인생의 스냅샷이 될 자격이 있지만 그 앨범이 나왔던 순간과 장소를 명확히 묘사하고 있는 앨범이야말로 더더욱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 앨범은 상업적으로도 성공적인 편이었다. 비록 두 번째 앨범은 좀 부진했다고는 해도 말이다. 실제로 그랬었고, 다른 식으로 생각한 적도 없다.


  LA에서 데이브 사디와 같이 녹음한건 실제로 앨범에 수록된 곡 중 단 여섯곡이었다. 우리가 그 개수에 해당하는 금액만 지불했기 때문이었다. 데이브는 금전적인 부분에서 굉장히 칼같은 사람이었다. 당신은 7번째 곡을 작업하는건 안됐던건가? 라고 생각한다면 그에 대한 그의 답은 이랬을 것이다. ''지금 저한테 키보드 스페이스바를 한 번 더 누르게 하려면 만 달러가 청구될텐데, 지불하실거에요?" 그러기 쉽지 않을거 같다는 분위기가 흐르고 내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누군가 말하는 목소리가 들릴것이다. 그래서, 정말 그러고 싶은건가? 진짜? 집중하고 생각해봤다. 괜찮은데. 우리는 느낌이 좋았고 다시 뭔가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완전히 계획을 망쳐놓았다. 결국 우리는 6곡에 7만달러를 쓰고, 우리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서 나머지 곡들의 작업을 끝내기로 했다. 글래스고의 토니 두간과 함께말이다. 사디와 있을 때는 우리 모두 선셋앤바인*에 한달인가 두달 머물렀었다. 글래스고에서는 넘실거리는 물결과 야자수가 흔들리는 모습과는 정반대인, 도시 중심에 있는 거대하지만 낡은 주택을 빌렸었다. 하지만 레코딩 작업은 매끄럽게 진행됐고 토니는 정말 엄청난 솜씨를 보여줬다. 그는 이미 만들어졌던 노래들과 완벽히 어울리는 소리를 구현해줬다.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조용하게 충돌하며 하나의 앨범을 이뤘던 그 방식이 맘에 들었다.


  모든 리허설과 레코딩 작업에 걸쳐 나는 계속해서 게리를 가까이했다. 그는 전세계에 존재하는 최고의 드러머 중 한 명이기도 하지만, 늘 내 어깨 너머로 내 마음을 살펴주고 안심할 수 있게 해주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는 두 개의 밴드 모두 변함 없는 폼의 연주를 보여줬고, 그의 스네어 드럼 소리가 들리고 나면 비로소 나는 달릴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방금 문장은 우리가 파리의 클럽에서 데뷔 공연을 했을 때를 정의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해외로 나가 공연을 하는 건 의도적인 생각이었다. 우리는 런던과 영국의 언론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막상 모습을 드러내고 나서 충분히 멀리 가진 못했다. 영국의 음악 언론쪽 기자들이 대거 몰렸고, 보기엔 꽤 열띤 분위기가 있었던거 같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이 제일 많았고, 그들의 모든 잡지사나 미디어매체까지 모이면서 갑작스레 이건 좀 서커스같은 풍경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재미면에서 말이다. 만약 공연장 규모라는 용어로 보통 대신해서 표현하는 몸값을 내리게 되면 어딘가의 도박꾼들이 울고 웃는 걸 보게 될 것이다. 스릴의 일부이며,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 일의 일부이기도 하다. 난 그런 상황에 대해 대환영인 입장이었고, 내가 그런 걸 많이 놓쳐왔다는 걸 깨닫게 됐다.


  이탈리아 공연 3개가 빠르게 이어졌다. 우리 이름이 간판으로 걸렸다. 소란스러운 공연, 견줄데 없는 쾌락주의의 향연. 그리고 우리 밴드는 비행기를 향해 행진하다 총구가 겨눠지고 리미니 공항에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되었다. 어찌됐건 그 이틀 간 이상한 일이 계속해서 발생했다. 우리는 우리의 무대를 정확히 이해하고 우리 라이브 음향이 어떤지 알아보려했고, 내가 어떤지 전혀 모르는 한 밴드와 동행하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피트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는데, 작곡에 관한 재능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화법이나 태도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그렇게 행동하는게 당연하다는 듯, 약을 빨고, 재미도 없는 시시한 복수나 일삼았다. 그는 끝도 없이 리버틴즈 때 있었던 문제들에 대해 집착했고, 우리가 더티 프리티 띵즈를 하는 건 어디의 좆만한 새끼보다 못하다는 얘기를 지껄였다. 그런 말은 명백히 내게 필요한 말도 아니었으며 이후 어느 시점에라도 내게는 필요 없는 말이었다. 불쾌하고 한심하다는 생각이 듬과 동시에 나는 존나 미친듯이 화가 났다. 나는 어쨌든 내 상처가 억지로 벌려지는 곳에 놓이게 된 것이었으며 나는 그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난 그를 마구 때리기 시작하면 나를 멈출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와 그의 밴드에게 필요한 경비를 지불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혐오스러웠던 그 상황을 제쳐두면 나는 우리의 진척 상황에 제법 기쁜 상태였다. 우리들에게 긍정적인 분위기가 감돌았고, 공연장은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나는 우리가 기반을 차근차근 쌓아 올릴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가 공항에 막 도착했을 때 우린 모두 오늘이 기념적인 날이 될거라는 기분이 들었고, 1등석에 들어서자 그 기분은 더더욱 최고조로 상승했다. 하지만 바로 그게, 큰 실수였다. 우리가 좌석에 착석했을 때, 우린 씨발 완전히 엉망이고 반 정도 미친 상태에 역겨움마저 느끼게 하는 새끼들이 되어었었다. 무슨 멍청한 클리셰라도 재현하는 것처럼. 그리고 내 어깨 위로 얹어지는 손이 느껴졌다. 난 뒤돌아 보았고, 우선 첫번째로 보이는 것은 무척 과장된 몸짓을 짓는 승무원이 보였다. 호들갑을 떨면서, 완강하게 거절당한 승무원이었다. 두번째로 보인 것은 경찰이었다. 그는 리볼버에 손이 가 있었다. 거기에 경찰관은 밴드 멤버 각각에게 한 명씩 붙어있었고, 다들 장난치는 걸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나서 그들은 우리를 내리게 했고, 소지품을 모두 가져가 버리며 말하길, 우리는 더이상 환영받지 못할거라고 말했다. 우리가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다른 공항을 이용해야 했다. 1등석에서 출구로 끌어내려지면서 돌아오지 말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우리의 명예가 실추되는 상황이었다. 난 그 블랙리스트에 내가 아직 적혀있는지 아닌지 모르겠다. 확인하러 다시 간 적은 없다.


  투어 매니저는 우리를 호텔로 다시 데려다놨고, 우리는 잠자길 거부했다. 다음 비행기에 타기 전까지 우리와 함께 이동한 수많은 장비들을 정비하고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의 투어에서는 코카인을 사는데 만4천 파운드인가 써버렸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상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면 아마도 내가 통제불능이었거나 아예 신경을 안썼거나 그랬을 것이다. 약은 어쨌든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에 색깔을 입혀줬고, 잠을 잘 이유도 없게 만들어줬다. 그래서 우린 그냥 어떤 방법으로든 그걸 내팽겨칠 수가 없었다. 많은 밴드들에게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문제였고, 나는 함께한 밴드를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세관 검사가 있을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더 많이, 더 자주 억지로 하는 일이 많아지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더티 프리티 띵즈의 첫 투어를 만끽했다고는 하나, 나는 피터를 옆에 두고 무대에 올랐을 때만큼 겁에 질려있었다. 아마 그보다 더 겁을 먹고 있었을지 모른다. 내가 피터와 함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리병에 얻어맞을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의 열정을 통해 영감을 받는 건 정말 멋진 일이었다. 난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깊게 그리고 직접 목소리를 내며 신경 써주는 게 너무나 기뻤다. 하지만 우리가 흩어지고 나서 나는 그 폭력적이기까지 한 열정이 부정적인 모습으로 변하는 것에 공포를 느꼈고, 그 공포에 대한 내 반응 역시 좋지 않았다. 나는 피터에 대해 정말 많이 생각했고, 추측컨대 그도 나와 비슷한 반응을 얻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마 그는 그렇지 않았다고 부정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여전히 내가 몸 담았던 첫 밴드가 분열되었던 일에 대해 고통과 수치심을 가지고 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지금도 충격을 받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게 사실이다. 반면 그때의 나는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이게 내가 하는 일이고, 이게 내 행동의 이유들이야.'

 

  사람들은 가끔 내가 더티 프리티 띵즈를 통해서는 받았지만 리버틴즈에서는 받지 못한게 뭐냐고 물을 때가 있다. 나는 잠시 멈추고 생각해봤고, 내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두 갈래가 있는데, 약간의 고통 완화 그리고 자존감의 회복이다. 나는 다른 밴드로 부터 그 안락함을 찾으며 생각했었다. 얘네들은 피터랑 나 사이에 있었던 그런 좆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아. 친구들인걸. 이제와서 깨닫게 된거지만, 난 허식 아래에 뭐가 있는지도 확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잠시동안 내게 필요했던건 바로 그거였다. 예전부터 있었던 마음의 안정에 대한 내 갈증은 실제로 내게 다작하는 능력을 앗아갔다. 왜냐하면 나를 그 특별한 길을 걷게 만드는 다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피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며 더티 프리티 띵즈에서 얻었던 가치는 내가 늘 원했던 것이었고 끝내 나에게 내려왔다. 우리의 공연에 찾아온 관객들을 나눠보면 두 가지 부류로 나뉘어졌다. 피터를 둘러싼 여러 타블로이드 매체들이 양산하는 것들에 이끌려 공연에 찾아와 자리만 잔뜩 차지하고 있는 병적인 열성분자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 외에도 내가 감사함을 느낀 진짜 팬들도 있었다. 나는 혼자가 된 후 내 안에서 흘러나오는 비관적인 예측들을 피해가며 홀로 그만큼 해냈다는 사실에 정말 기쁘면서도 놀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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