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1

2018. 8. 29. 03:42

Audiobook ~ 02:25:34, Translated on 29 August, 2018

  나는 리버틴즈가 흩어진 후, 무엇에 매달려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배는 가라앉았는데 매달릴 표류물이나 해양 폐기물 같은데라도 매달려 있어야 했다. 잠시 동안 나는 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고, 그러다가 하루는 정말 많은 것을 생각했다. 내가 밴드를 하는게 나한테 맞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리버틴즈의 종말이 말로 다 풀지도 못할 정도의 비극으로 다가온 후 스스로 그렇게 느끼기 시작했다. 리버틴즈의 끝자락에서 앤서니 로소만도가 내 인생에 들어와 함께 느낀 그 창조적인 파트너십 그 이상을 주고 받은 건 자연적인 연쇄작용으로도 느껴졌다. 그리고 한 단계 더 나아가 내 이기적인 측면에서도 나는 그런 식으로 사는데에 익숙해져 있었다. 모두가 패닉에 빠진 일면도 있긴했다. 정말 다 끝나버린건가? 만약 그렇다면 우린 어떻게 하지? 우리가 진짜 직업을 가지게 될 일은 없을텐데!

  술에 취하고, 약에 취한 숱한 밤을 거치며 나는 배의 갈피를 붙잡고 모두의 걱정을 누르기로 했다. 걱정 마, 얘들아. 내가 너넬 보살필거야. 전부 해결할거라고. 약에 절여진 터무니없는 말들, 너무나 많은 칵테일이 그때의 나에게 허세를 들이부었다. 좀 시간이 지나고 우리는 이게 우리가 할 일이라고 추측하게 되었다. 새로운 밴드를 하자, 그리고 새로운 비즈니스가 물밀듯이 밀려오기 시작할거야. 우리는 정말 터무니없을 정도로 밴드 이름 후보 리스트를 가지고 있었다. 밴드 멤버들이 제시한 것들이었는데 우리가 자주 들르며 언쟁을 벌이던 곳의 이름을 우리의 명칭으로 쓰기로 했다. 그즈음 리버틴즈의 베이스 연주자였던 존이 조용히 떠나 그의 사이드 프로젝트로 하고 있던 밴드인 Yeti쪽에 집중하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별로 놀랍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를 떠났다는 사실에 기분이 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난 우리가 그 이후에 대단한 계획을 세웠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지금까지 읽었다면 우리가 그럴 인재들은 아니라는 건 충분히 알거라 생각한다. 우리는 솔직하게 누가 베이스를 연주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지만 우리에겐 추진력도 있고 나아가려는 마음가짐도 있었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데리고 와야하는 상황이었다. 베이스가 없는 밴드라니 말이 안되잖아?

  리버틴즈와 새로운 밴드에 사이에 나는 DJ를 맡는 건 계속해왔는데 Wakestock이라는 웨일스의 페스티벌에서 디제잉을 했을때 기나긴 밤이 지나고 웰시의 해안선 너머로 태양이 떠오르는걸 바라본 적이 있었다. 나는 누군가의 랜드로버차 위 지붕에 Cooper Temple Clause의 디즈와 앉아 그에게 리버틴즈가 끝나버린 후 썼던 두 곡을 들려줬다. 그 두개의 '죽음'을 담은 노래들. 나는 그 곡들을 그렇게 부른다. 하나는 'Bang Bang You're Dead'였고, 하나는 'Deadwood'였다. 두 곡 모두 싱글로 만들어질 것을 염두에 두고 쓴 곡들이었고 모두 'dead'라는 단어에 의지하고 있는 곡이었다. 나중에 가서는 꽤 중요한 의미가 된 곡들이었다. 그 곡들은 리버틴즈가 마지막을 맞은 후 감정의 파도에 밀려가며 썼던 곡들이었는데, 지나고보니 꽤 리버틴즈스러운 곡들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나의 위치가 그러했고, 어둡고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나는 디즈에게 어떻게 생각하냐 물었다. 그가 우리 밴드에 들어올지 말지 간을 보는 거였다. 나를 위해서 그가 오디션을 보는게 아니라 내가 그를 위해 오디션을 보러 간 것처럼. 그는 두 곡다 마음에 들어했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앤서니가 이미 들어왔고, 게리도 있었다. 그러니 모든게 완벽해졌다. 특별히 Cooper Temple Clause에서 디즈를 빼온것에 대해 자랑스럽지는 않다. 난 그를 만나고 결심했다. 우리의 생각을 충분히 나누고 비슷한 사고방식을 공유하고 있었기때문이다. 내겐 그를 밑바닥으로 잡아 끈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슬픈 일이었다. 나는 언제나 Cooper Temple Clause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즈가 합류하며 우리는 새로운 질서속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그 자리에 서게 되었다.

  그 보잘것없는 재림은 바로 그 곳, 워털루 역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 당시 워털루역 근처에서 살고 있었고, 우리는 리허설을 하러 알래스카 스튜디오에 가곤했다. 그 스튜디오가 아마 70년대의 the Slits랑 관계가 있는 곳이었을거다. 우리는 그 곳에 매력을 느꼈고 그 옆에는 게이 사우나가 있었는데 Pleasure Drome이라는 곳이었다. 철도 아래 한산한 곳이었는데 온갖 것들이 있는 곳이었다. 올곧은 노력에 잘 맞는 약간 누추한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우리는 취한채로 사우스뱅크까지 달리기시합을 한적도 있고 포장된 평판을 위로 아래로 달린적도 있었다. 모든 것에 대해 약간 경쟁심을 가지고 행동하곤 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친구와 함께하는 무고한 밤의 즐거움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게 함께 음악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방법이었다. 클럽이나 무대 뒤에서 약을 하고 기타 등등 그딴 걸 하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상쾌함이었고 새로운 새벽이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무척 외향적인 밴드였다. 디즈가 내게 그렇게 말한 적도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궤도를 타기 시작했을때, 우리는 언론에 대해 과하게 신경쓰지 않기로 했고 왠지 모르게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녹음을 하는 날 끝에는 항상 워털루 다리로 가서 풍경을 바라보았다. 서쪽 너머로는 오래된 세상과 오래된 질서가 잔재하고 있었고 반대 방향, 동쪽으로는 거대한 크레인 아래 한줄로 쭉 변화가 밀려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새로운 세계는 거기에 웅크려서 기다리고 있었다. 굉장히 불가사의하게 느껴졌다. Ray Davies가 그 해질녘을 노래한건 그런 이유에서 였을것이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워털루는 유로스타가 들어오는 곳이고 더 중요한 건 파리에 대한 내 사랑을 휘젓은 곳이라는 것이다. 나는 우리의 첫 앨범을 Waterloo To Anywhere이라는 타이틀 외에는 딱히 붙일 수 있을만한 게 없었다. 내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모든 제약에서 벗어나 문자 그대로 내가 원하는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의미를 담아.

  밴드가 결성되기도 전에, 또는 이름도 짓기 전에 나는 이미 Vertigo라는 곳과 계약을 확보한 상태였다. 그들은 내게 백지수표를 건네며 내가 뭘 내놓든 그저 지켜보겠다며 음악에 관해서는 내게 모든 것을 맡겼다. 비록 그렇다고는 해도 계속해서 데드라인이 다가왔고, 또 데드라인이 있고, 또 다시 데드라인이 있었다. 몸집이 큰 곳과 계약한 건 꽤 괜찮은 기분이었다. 우리를 보조해주는 모든 것들이 있었다. 영상 감독, A&R, 경호팀, 운전팀까지 모든 게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무언가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유로움을 느꼈다. 즉각적으로 새로운 프로젝트가 착수되며 나는 다시 밴드를 하게 되어 기쁘다고 생각했고, 무언가에 대해 사과할 필요도 없었다. 난 리버틴즈에 있었던 대부분의 시간을 사랑했지만, 좀 성가신 상황도 존재했었다. 언제나 뭔가에 대해 나는 사과해야했고, 그건 내가 원한 것도 아니며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들에 대한 사과였다. 새로운 밴드에서는 우리 모두가 같은 페이지에 존재했고, 함께 투혼을 발휘할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이전에 다른 밴드를 경험했었고, 약간의 성공도 맛보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빠르게 하나로 뭉칠 수 있었다. 우리는 세상을 등진 4명의 사람이었고, 뭔가 수상을 바라는 상태였다. 그리고 이번엔 마치 우리가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아는 사람들이라고 느꼈다. 버나드와 함께했던 초기 리버틴즈의 녹음 작업과 비교하면 Dirty Pretty Things의 음반은 경쾌한 편이었다. 그 갱단같은 느낌의 정신을 가지고 모험심도 안에 가미되어 있었다. 내 생각에 디즈는 자신이 몸담았던 곳에서 했던 방식을 통해 우리의 앨범을 한 단계 높은 곳으로 올려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건 중요한게 아니었다. 만약 그가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는 것에 놀라움을 표했다면 우리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거라고 배워왔다. LA로 가서 앨범의 절반을 Dave Sardy와 작업했다. 그는 마릴린 맨슨이나 레드 핫 칠리 페퍼스, 조니 캐쉬에 이르기까지 많은 유명 아티스트와 작업을 한 사람이었다. 내 생각엔 Vertigo의 누군가가 세계적으로 뻗어나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결정한게 아닐까 싶다. 그 말은 내가 국경을 넘어서는 가수가 될 수 있다는 거였고, 그걸 원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 첫번째 앨범에 투자를 한 사람이 많았던게 아닐까 생각한다. 나와 내 새로운 밴드에 사람들이 믿음을 준다는 건 정말 신나는 일이었고, 우리가 그런 식으로 인식되어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모두 자신의 앨범을 세계의 모두가 사랑하길 원하면서 그들의 말과 사람들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아아, 정말 그러지는 않았고, 어떤 지하철 역이 확실히 연결되어 있긴 했었다.

  나 혼자 뭔가 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고 느꼈고 특히 피터가 케이트 모스와의 이러저러한 이야기로 언론에 나오기 시작했을 때 더 그랬다. 내가 하는 것들은 언제나 그늘에 가려져버렸고, 차트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도 못했다. 피터는 그런 명성에 관해서는 나보다 한 수 위였다. 언제나 그랬고, 앞으로도 줄곧 그럴 것이다. 그는 세상의 이목을 끄는 옷차림, 그리고 행동을 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그를 존경한다. 파리의 초콜릿 박스 안 같은 낡은 극장에서 Dirty Pretty Things로 공연을 했던 적이 있다. 아마 밴드의 끝자락, 모든 것의 끝자락으로 향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피터는 같은 도시에 있었지만 우리는 그때까지 서로 제대로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러나 다수의 별거중인 '커플'들이 그러하듯 우리는 문자는 주고 받고 있었다. 그는 공연을 보러 오고 싶다고 했고 자연스레 나는 당황했다. 그리고 셋리스트를 보며 우리가 리버틴즈 곡은 어떤 걸 하는지 확인했다. 'I Get Along'이 순서에 있었고, 공연 내내 나는 그가 어디에 있는지 찾았다. 그러면서 내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우리를 보러 온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더더욱 긴장했었다. 뭔가 그에게 강한 인상을 주고 싶었다. 그는 귀빈석쪽에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당연히 나는 그를 거기서 찾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어야 했다. 마지막 곡 순서가 되자, 우리는 피터가 올라와 'I Get Along'을 함께 해줄거라고 관중을 향해 말했다. 공연장은 미친듯이 열광했다. 그리고 나서 긴장을 푸는 기나긴 시간이 흘렀다. 알고보니 피터는 5분 전에 공연장을 빠져나갔다는 걸 알게되었고, 우리는 창피함과 혼란스러움에 빠지게 됐다.


▷▶▷